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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제 때 남망기가 흘린 눈물로 인계엔 홍수가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재해에 인간들은 용신께 공물을 올리고 제사를 지냈다. 그 간절한 성원들에 정신을 차린 남망기는 몇 날 며칠을 식음을 전폐한 채 면벽수련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다행히 평정을 빠르게 되찾아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지만 이번 일은 용신으로서 큰 실수였다.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다니, 참 기구한 팔자로구나.
위무선은 혀를 쯧쯧 찼다. 주작이나 백호나 현무로 태어나지 왜 하필 용이느냐. 금광선이나 강징 같은 녀석이 용이면 큰일이지만. 사방신을 모욕하는 발언을 한 그는 어린 게 고생이 많다며 남망기의 작은 머리를 거칠게 쓸었다. 남망기는 머리가 흐트러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위무선의 손길을 고분고분 받았다.
개인적인 감정을 접어두고 용신으로서의 입장만 고려해도 남망기가 위무선과 각인을 한 건 훌륭한 선택이었다. 위무선은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서 차분함의 정도가 평범한 선인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경박하단 소리를 들을 만큼 발랄했던 처음의 성격은 다 죽은 상태이니, 많아봤자 몇 백 살인 사방신들보다 정신적인 수양이 높은 건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망기의 평정이 살짝 흔들릴 때는 있었다. 저번처럼 홍수가 날 정도는 아니고 바람이 약간 강해지는 정도의 가벼운 일이었다.
“여우는 입맞춤을 통해 정기를 빨아간단다.”
위무선의 말에 남망기는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고비를 넘겨 신력이 한 단계씩 높아질 때마다 위무선은 ‘상’을 내렸고 남망기는 그 순간을 가장 좋아했다. 벌써 귓불을 붉게 물들이는 모습에 위무선은 웃으면서 가면을 벗었다. 매혹적인 얼굴이 드러나면서 붉은 입술이 아이의 보들보들한 얼굴에 내려앉았다.
정기가 빨린다는데 무섭지도 않느냐? 내가 널 꿀꺽 삼킬 수도 있잖느냐.
그 물음에 남망기는 꼬리를 더 살랑거렸다.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작은 이마와 양 뺨까지 세 번의 입맞춤이 끝나자 남망기는 위무선의 손을 잡고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올려다봤다. 보석처럼 어여쁜 금안이 더없이 반짝였다. 요 작은 머리통에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알고 싶은데, 말 못하는 아가야라 물어볼 수도 없구나. 위무선의 혼잣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남망기는 그의 팔을 꽉 끌어안았다. 위무선을 안기엔 제 품이 너무 작으니 팔이라도 안는 거였다. 아이가 이런 식으로 숨김없이 내보이는 애정은 위무선이라도 가끔 놀라게 만들었다.
전생의 넌 분명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대체 무엇을 얼마나 후회했길래 이번 생에는 이리 적극적으로 나오는 걸까. 아이라서 마음을 숨기는 법을 아직 몰라서 이러나. 만약 그렇다면 평생 가르쳐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잘 지내나 보군.”
“그럭저럭.”
위무선의 말에 남계인은 한숨을 쉬며 차를 따랐다. 은은한 차향이 퍼지자 가면 속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나왔다.
“술은 없나?”
“운심부지처에서 음주는 금……!”
“오냐, 알겠다, 알겠어.”
위무선이 여우 귀를 긁적이며 대놓고 듣기 싫다는 기색을 풍겼다. 저딴 놈이 용신의……용신의……. 차마 말을 맺지 못한 남계인은 애써 호통을 삼켰다. 내 수련이 부족한 탓이다, 내 수련이. 신선답게 자신의 잘못으로 돌린 남계인은 진정하려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동안 위무선을 주변의 풍경을 보았다. 모든 구조물이 검소한 운심부지처에서 보기 드문 거대한 전각이었다. 못해도 천 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드넓은 공간을 죽 둘러본 위무선은 다시 남계인을 보았다.
“여긴 어디지?”
“……의식을 치르는 곳이다.”
“무슨 의식?”
“용신의 성장을 돕는 의식.”
용의 성장은 감정의 큰 변화를 겪었을 때 나타난다. 그 변화란 대개 분노, 슬픔, 절망, 공포와 같이 어둡고 격동적인 것인데 그런 감정을 느끼도록 ‘돕는다’라……. 위무선이 빈정거렸다.
“그리 신성한 의식은 아닌가 보군.”
“그렇지.”
남계인은 의외로 순순히 긍정했다. 용신의 권속으로서의 자부심이 넘쳐나던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약간의 침묵 뒤 그는 위무선에게 물었다.
“용신이 성장을 해야 하는 순간이 언제인지 아는가?”
“신력이 강해졌을 때 아닌가.”
“그래. 아이의 몸으론 더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을 때지. 용신의 수양이 높아질수록 성장해야 할 시기는 앞당겨지네.”
“그렇겠지.”
“그리고 이번 대의 용신은 신력이 너무 빠르게 강해지고 있어.”
“…….”
“선계의 용신은 백 년을 넘긴 후에 성장을 이루셨지만…… 인계의 용신은 그러지 못할 것 같군.”
약간의 침묵 후 위무선이 물었다.
“제 시기에 성장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
“신력을 감당하지 못해서 사망하신다. 인계의 수호자가 죽으면 어떤 재앙이 벌어지는진 그대가 잘 알고 있겠지.”
용이 사라지면 인계엔 비가 내리지 않는다. 바람 한 점조차 불지 않아서 계절이 멈추고 가뭄과 전염병이 일어나 수없이 많은 목숨이 스러진다. 위무선이 염라의 형벌 중 가장 혹독한 영생형을 받은 건 남망기를 죽인 게 주된 원인이 아니다. 남망기가 사라지면서 죽게 된 인간들, 그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을 죽인 죗값이 더 컸다. 때문에 위무선은 난장강에서 저로 인해 죽은 영혼들에게 사죄를 하며 수천 년을 보냈다.
남계인이 말했다.
“용신의 감정에 변화를 줄 만한 일은 많지 않네. 신력이 높아지는 건 그만큼 평정심이 견고해진다는 뜻이니 어지간한 일로는 성장을 할 수 없어. 하지만…… 용신을 죽게 놔둘 순 없는 일이지.”
위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각인할 사람을 미리 정해두는 거군.”
“…….”
“용의 성장을 위해 각인자를 죽여야 하니까.”
세상의 풍파를 겪고 나이를 지나치게 먹어갈수록 위무선은 눈치가 빨라졌다. 사실 처음부터 예상한 일이었다. 용의 각인자를 혈육이 아닌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으로 정하는 건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
남계인이 말했다.
“난 선계의 용신의 각인자가 되어 그 분의 성장을 위해 죽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전대 용신께서 갑작스럽게 사망하셔서 나의 임무는 사라지게 되었지. 그래서 인계의 용신을 위해 죽기로 다시 결심했지.”
“네가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이유가 있었군.”
신선이라도 목숨을 내놓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이는 건 더더욱. 위무선의 건조한 칭찬에 남계인은 고개를 저었다.
“대의를 위해서라곤 하나 용신께는 잔인한 일이지.”
“그렇다고 인계를 저버릴 순 없으니 선인의 입장에선 악을 저지를 수밖에.”
위무선은 피식 웃었다.
“네가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건 영생을 살기 때문이었군. 죽어서 용의 성장을 도울 수 없으니.”
“…….”
“하지만 상황이 달라진 모양이야.”
남계인은 눈을 침통하게 내리깔았다. 가슴을 저미는 듯한 죄책감이 그의 전신을 짓눌렀다. 처음에는 용신이 이릉노조와 각인한 게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용신의 성장과 함께 사특한 이릉노조를 처단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까. 하지만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남망기는 위무선을 너무 좋아했다. 단순히 각인을 해서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깊은 정을 주었다. 남계인은 역사서에 적힌 내용을 떠올렸다.
이릉노조에게 살해당한 전생의 남망기는 한쪽 뿔이 부러진 상태였다. 서기는 이릉노조가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뿔을 꺾어서 먹은 거라고 기록했지만, 실상은 다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의 뿔에는 극소수에게만 전해져오는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용은 자신의 뿔을 먹인 자와 다음 생에도 인연을 맺게 된다.
전생의 남망기는 위무선을 지키기 위해 동굴에서 수사들과 열흘 간 대치했다. 아무리 용신이라 해도 그만한 죄인을 감쌀 권한은 없고 위무선이 처형을 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전생의 남망기가 뿔을 내준 거라면. 이번 생에선 이루어지지 못하니 다음 생에서라도 만났으면 하는 마음에 뿔을 내주었던 거라면. 그리고 영원토록 이어지던 수레바퀴를 돌아 환생한 남망기가 끝내 위무선과 다시 만나게 된 거라면.
눈과 귀가 먼 자라도 알 수 밖에 없었다. 위무선을 보는 남망기의 눈에 깃든 감정이 무엇인지를.
남계인은 소매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염라대왕님의 전언이시다.”
“…….”
“‘위무선. 그대는 오랜 세월 난장강에 모여든 영혼들을 성실히 위로하며 모든 업보를 씻어냈다. 그러니…….’”
영생형에서 벗어나 용신의 성장을 도와라.
운명을 결론짓는 선고는 예고 없이 내려졌다. 위무선은 가면 속에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길었다.
너무 긴 시간이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 이 순간을 바라왔던가. 망각하는 능력을 빼앗긴 채 난장강에 유폐된 순간부터 그는 죽지 못해 살아야 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직접 죽이는 감각은 여전히 손안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상실을 겪는 게 두려워 풀 한 포기에도 정을 주지 못하던 외로운 시간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닌 죽음을 갈구하는 삶은 더는 삶이라 부를 수 없었다. 그랬던 죄인에게 드디어 안식의 순간이 찾아왔다.
위무선은 약병을 느리게 집어 들었다. 손가락 길이만 한 작은 약병은 지나간 세월을 허무하게 만들 만큼 너무 가벼웠다. 자신이 부리는 흉시들에게 찢겨 죽은 후 지옥의 심판대에 도달했을 때가 떠올랐다. 무릎을 꿇은 위무선에게 뿌연 안개 속의 염라대왕은 작은 약병을 건넸다. 지금 손안에 든 것과 같은 것이었다. 지옥의 정수로 만든 이 약은 한 번 마시면 영생을 살고 두 번 마시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다. 환생의 수레바퀴가 부서지면서 영혼까지 소멸해버리는 진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 ‘소멸형’이야말로 위무선에게 내려진 진정한 처벌일 것이다.
위무선이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참 기구한 팔자로구나.”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면서 좋아하는 이의 죽음을 봐야 하는 삶이라니, 어쩜 이리 가여워…….
약병을 준 후부터 남계인은 계속 눈을 감았다. 차마 위무선을 볼 수 없는 듯했다. 위무선이 거대한 전각을 나섰을 때 선인들은 어두운 얼굴로 위무선에게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하는 게 이치에 맞지만 그렇다 해서 그 희생이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전지전능한 용신이 유일하게 알 수 없는 사실은 각인자가 자신의 성장을 위해 죽을 운명이라는 것. 사람을 죽이고 아이를 속여 큰 상처를 입히는 이 부도덕한 관행은 용신의 권속이라면 응당 껴안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이었다.
저에게 사죄를 하는 이들을 지나쳐 정실로 돌아간 위무선은 침상에 앉았다. 작은 아이가 꼬리로 몸을 만 채 가쁜 숨을 색색 내쉬고 있었다. 신력을 주체할 수 없어 열이 오르는 것이다. 위무선이 뜨거운 이마에 손을 얹자 몽롱한 노란 눈이 스륵 떠졌다.
“나 때문에 깼느냐? 미안하다.”
그 말에 남망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침상 위를 기어서 위무선의 꼬리를 끌어안고 다시 누웠다. 털 뭉치 속에 있는 게 더 더울 텐데도 남망기는 평소의 잠자리를 고집했다. 위무선이 웅크린 작은 등을 쓸어주면서 물었다.
“견디기 힘드냐?”
남망기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발갛게 열이 올라 숨 쉬는 것도 힘겨워하면서 아이는 괜찮은 척을 했다. 위무선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조금만 더 아프거라.”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주렴.
남망기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위무선이 열을 가라앉힐 방도를 찾아오겠단 걸로 알아듣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망기는 다시 기절하듯 잠들었다. 위무선은 그런 아이를 강보에 싸서 안은 뒤 어딘가로 향했다. 느릿한 걸음이 도달한 곳은 장서각이었다. 기억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구조는 같았다. 2층의 나무 창을 잠깐 올려다보던 위무선은 방향을 돌렸다. 운심부지처의 입구를 경계 짓는 담벼락이었다. 그 위를 거닐다가 이번엔 냉천으로 향했다. 투명하고 차가운 물을 들여다보던 그는 이후 운심부지처를 나와 인계에 내려갔다. 위무선은 꼬리를 숨긴 뒤 어떤 마을에 들어가 천자소 한 단지와 작약 한 송이를 샀다. 그 후 마을과 좀 더 떨어진 연꽃 호수에 가서 연방 몇 개를 땄다. 꿩도 잡을까 했지만 오늘처럼 좋은 날에 살생은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았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고 주변이 어두워져서야 남망기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이는 두터운 꼬리털이 아닌 강보에 싸인 제 모습에 의아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붉은 여우불이 허공에서 지펴져 어두운 동굴 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 동굴의 깊숙한 곳에서 가면을 벗은 위무선이 어떤 바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남망기는 바위 앞에 놓인 술단지와 작약과 줄기 있는 연방들을 보다가 다시 위무선을 보았다. 열로 흐릿해진 시야로 보아서 못 알아챘는데 자세히 보니 위무선이 기댄 건 평범한 바위가 아니었다. 이끼 한 점, 잡초 한 포기조차 나지 않은 희고 거대한 저것이 무엇인지 남망기는 알 수 있었다.
용의 시체였다.
용은 죽는 순간 그 자리에서 돌로 변해 영원토록 뿌리박힌다. 비바람도 세월도 본래의 모습을 손상하지 못했다. 시체가 된 저 용은 생의 마지막까지 무언가를 지키려 했는지 몸을 둥글게 말아서 잔뜩 웅크린 모습이었다. 그리고 심장이 있는 부근에 눈에 띄게 큰 구멍이 나 있었다. 위무선은 그 구멍에 색이 연한 작약을 넣어두었다. 그러곤 용의 얼굴이었을 부근에 이마를 기댔다. 차마 다가갈 수 없는 애틋한 분위기에 남망기는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했다. 잠시 뒤 위무선이 말했다.
“하는 짓이 너무 답답해서 보기 싫었지.”
바위가 된 용에게 하는 말일 거다. 남망기가 노란 눈을 의아하게 깜박이니 위무선은 옅게 웃었다.
“그러니 이번 생에는 좀 요령있게 살거라.”
“…….”
“비 좀 내린다고 큰일 나는 거 아니니까 울고 싶으면 울고, 아프면 마음껏 투정 부리고, 가끔 규율을 어겨도 좋고…….”
그 말에 남망기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기분 탓일지 모르지만 위무선의 분위기는 평소와 많이 달랐다. 강보를 털고 일어난 아이는 위무선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런데 투명한 벽을 마주한 듯 걸음이 막혔다. 공간을 비트는 여우의 환각술이었다. 용의 혜안조차 속일 만큼 위무선의 도력은 지나치게 강해져 있었다. 당황한 남망기가 보이지 않는 장벽 위에 손을 얹었다. 아이의 손을 주변으로 붉은 기의 파동이 퍼져나갔지만 주술은 풀리지 않았다.
“성장을 해서 인계에 시찰을 나갈 땐 당호로를 한 번 먹어 보아라. 산사나무 열매로 만든 건데 선계의 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제법 맛있단다.”
남망기는 장벽을 통통 두드렸다. 위무선은 그것을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기회가 되면 천자소도 마셔 보아라. 예전에 비해 맛이 많이 달라졌지만 새로운 것도 나쁘지 않더구나. 바깥에서 몰래 마시면 남 선생도 모를 거다.”
위영. 위영. 남망기는 이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를 낼 수 없어 알아들을 수 없는 숨결만 나왔다.
“수련도 중요하지만 휴식도 중요하지 않겠니. 너무 일만 하면 성정이 나빠진단다. 인계의 시장엔 재미있는 게 많으니 한번씩 놀러 가거라. 그렇게 지내다가 연모하는 이가 생기면 망설이지 말고.”
지나가듯 덧붙인 마지막 말에 남망기는 모든 행동을 멈췄다. 커다란 금안이 충격으로 떨려왔다. 위무선은 그제야 아이의 눈을 마주했다.
“너만 한 아이가 연심을 고백하면 아무도 거절 못한다. 이 노인네가 장담하마.”
“…….”
“언젠가 어여쁜 선녀와 혼인해서 아이도 낳고 오순도순 잘 지내야지.”
상냥한 말이었지만 남망기에겐 아니었다. 가슴을 후벼파는 상처가 짙게 새겨졌다. 남망기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무언가를 말했지만 너무 긴 문장이라 입 모양으론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위무선이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남망기는 간절하게 팔을 뻗었다. 장벽을 공기처럼 통과한 손이 그 작은 손을 맞잡아줬다. 다른 손으론 아이의 고운 뺨을 쓸어줬다. 그리고 이마와 두 뺨에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세 번의 접촉이 끝나자 남망기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이는 놓으면 죽을 것처럼 위무선의 손을 필사적으로 꽉 쥐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본능처럼 직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무선은 망설임이 없었다.
또 다른 주술이 장벽에 덧대어졌다.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눈앞이 어둠으로 막히자 남망기의 전신에 핏기가 빠져나갔다. 아이가 신력을 끌어모아 장벽을 공격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지금 위무선의 주술을 깨려면 염라나 천제가 와야만 가능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자 남망기는 이젠 작은 손으로 장벽을 거세게 두드렸다. 여린 피부가 찢겨 피가 나왔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위무선은 어둠을 향해 우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상황까지 왔는데도 자신은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슬프지 않은 게 아니다. 이런 고통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위무선은 장벽을 더듬었다.
죽음은 한 번 겪어봤기에 두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간절히 바라던 거였다. 죽어서 들꽃이나 토끼처럼 정실의 마당 한 편을 차지하는 미물로 다시 태어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무엇으로 환생하든 상관없으니 다음 생에는 그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물론 헛된 꿈이라는 걸 안다. 죄인에게 행복해질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환생한 남망기와 있던 시간은 예상치 못한 선물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의 죽음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남망기는 비참하게 죽었다. 그런 이가 다시 살아 돌아와 저를 여전히 좋아해 주니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내심 기뻤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아주 다행이라 생각했다.
전생의 너는 나로 인해 죽었지만 현생의 너는 나로 인해 살게 되는구나.
마음의 상처를 입히는 과정이라도 괜찮았다. 위무선은 망각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잠깐은 힘들지라도 세월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거다. 그저 아쉬운 건 하나였다.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가지 못하는 거.
쿵, 쿵―. 장벽이 거칠게 두들겨졌다. 남망기의 고운 뺨 위로 구슬처럼 떨어지던 눈물이 이제는 줄기가 되어 펑펑 쏟아졌다. 피범벅이 된 작은 손을 본 위무선은 더는 지체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소매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허락된 자만 열 수 있는 약병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흘러나와 주위를 메웠다. 처형을 주관하는 염라의 권속들이었다. 소멸형을 받은 죄인의 죽음을 감시하러 온 것이다.
[유언은 없느냐?]
권속의 물음에 위무선은 답했다.
“이미 했습니다.”
그 말에 권속은 장벽 앞에 주저앉아 우는 아이를 보았다. 다른 권속이 말했다.
[그대의 고귀한 희생은 천하에 알려질 것이다.]
“……희생은 무슨…….”
위무선은 약병을 입술에 갖다 댔다. 작은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속죄이지요.
그때였다. 눈이 멀 듯한 섬광이 번쩍이더니 동굴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하늘을 반으로 가르는 푸른 벼락이 동굴을 부수고 땅에 스며들어 거대한 지진을 만들었다. 안식을 방해하는 하늘의 움직임에 염라의 권속들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위무선은 흔들림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졌다. 무너진 동굴 안으로 폭우가 들이닥쳤다. 그 차가운 빗방울을 맞는데도 상황을 파악할 수 없던 위무선에게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가지 마세요…….”
…….
“제발, 저를 떠나지 마세요……….”
울음이 섞인 낮은 목소리는 너무 떨려서 알아듣기 힘들었다. 하지만 정신을 잡아끌기 충분했다. 위무선이 고개를 들었다. 장벽 앞에 주저앉은 아이에게 더듬더듬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아이가 아니라 사내에게.
위무선과 비슷할 만큼 커진 몸에 드넓은 어깨가 보였다. 비에 젖은 날개옷이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하게 비쳐 단단한 사내의 육신을 보여줬다. 솜털처럼 미세하게 비치던 비늘도 없이 하얗기만 한 피부는 성장한 어른의 것이었다. 위무선의 엄지도 겨우 쥘 만큼 작던 손이 이젠 위무선의 손보다 더 커져서 어둠의 장벽을 원망스럽게 긁어냈다. 빗물보다 더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지학을 조금 넘긴듯한 고운 사내가 입을 열었다.
“분명 제 곁에 있어 줄 거라고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저를 떠나지 않을 거라던 말을 잊으신 겁니까.”
“…….”
“지나간 세월이 괴로워 참기 힘든 거라면 제가 슬프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도 떠나고 싶다면 조금만……조금만 더 늦게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제가…….”
“…….”
“그대를 은애하니까…….”
피에 젖은 손이 힘을 잃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고개를 떨군 남망기는 하염없이 울었다. 빗물이 그의 눈물과 함께 끊임없이 쏟아졌다. 바람 한 점 없이 일직선으로 곧게 내리는 비는 주인의 심정을 대변하듯 힘없고 처연했다.
한참 동안 움직임이 없던 위무선이 팔을 뻗었다. 덜덜 떨리는 손끝이 울고 있는 사내에게 뻗어졌다. 사실 위무선이 가장 바라던 건 죽음도 환생도 아니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다시 너를…….
영원히 견고할 것 같던 주술이 풀렸다. 남망기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서 살아있는 위무선을 본 순간 남망기는 달려가서 그를 품에 안았다. 전신을 휘감는 압박감에 위무선은 목구멍이 막혀왔다. 조금만 힘을 줘도 날아가던 연약한 감촉이 아니었다. 한 품에 들어오던 작디작은 아이가 이젠 저를 넉넉히 감싸 안는 사내가 되어 돌아왔다. 남망기는 이번엔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위무선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위무선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조율제 이후 남망기는 오밤중에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날 때가 있었다. 무슨 악몽을 꿨는지 달달 떨던 아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위무선의 가슴팍에 귀를 대보는 거였다.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이는 조용한 한숨을 쉰 뒤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위무선이 어딘가에 스쳐 작은 상처가 날 때면 남망기는 핏기가 빠져나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눈 한 번 깜박하면 낫는 상처인데도 자기가 다친 것마냥 매번 무서워했다. 가끔 먼발치에서 백호의 권속들이 보이기라도 하면 위무선의 장포를 끌어서 그를 방이나 기둥 뒤로 숨겼다. 아이가 왜 그러는지 짐작 가는 게 없는 건 아니었지만 위무선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뒀다. 저 콩알만 한 것이 저를 지키겠다고 고군분투 하는 게 내심 사랑스럽기도 했으니까.
아마 그게 실수였다. 위무선은 자신을 향한 남망기의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를 눈치채지 못했다. 전생의 남망기는 위무선을 지키려다 죽었고 현생의 남망기는 위무선이 죽는 걸 눈앞에서 보았다. 영혼까지 깊이 새겨진 공포와 그 기저에 깔린 게 무엇인지를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위무선이 남망기의 등을 마주 안았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왔다.
“미안하다…….”
내가 너한테 아주 몹쓸 짓을 했구나.
내가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만으로 성장을 해버리다니, 너는 대체 날 얼마나…….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위무선이 남망기의 머리를 끌어안고 그가 늘 안심해 하던 심장 소리를 들려줬다. 남망기는 위무선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 품에 간절히 파고들었다. 살아있다는 체온을 느끼는데도 눈물은 멈추지 않고 빗방울은 더 굵어져 갔다. 위무선은 끊임없이 사죄했다. 내가 어리석었다. 염라께 무릎을 꿇고 비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어. 어떻게 너 같은 아이를 두고 갈 생각을 했을까. 미안하다, 미안해.
그런데도 남망기는 진정하지 못했다. 염라대왕이 위무선을 처형하려 했단 사실을 알자 안색이 창백해지다 못해 퍼레져서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가려 했다. 위무선은 바닥에 떨어졌던 약병을 주웠다. 약병은 염라의 권속들이 사라지면서 저절로 뚜껑이 닫혀 봉인되어 있었다. 위무선은 그것을 남망기의 손에 쥐여줬다.
“네가 가져가거라. 가져서 버리든 말든 원하는 대로 하거라.”
약병을 버린다 해서 소멸형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의미 없는 짓을 해서라도 위무선은 남망기의 눈물이 멈추길 바랬다. 인계의 피해를 줄이려는 게 아니다. 남망기의 눈물을 볼수록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남망기는 상처가 짙은 손으로 그 약병을 받았다. 아주 무서운 것을 보는 시선이었지만 손에서 놓지 않고 꼭꼭 숨겼다. 남망기는 잠시 뒤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
“다시는, 이러지 말아주세요.”
화를 내도 될 만한 일이지만 남망기는 애원을 했다. 위무선은 절대로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조하마. 그 말에 남망기는 다시 위무선을 끌어안았다. 비에 젖어 차가워진 서로의 몸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전생의 남망기와는 해 본 적이 없는 접촉이었다. 그의 품은 상상보다 더 넓고 단단해서 마음 한 편을 떨리게 만들었다. 위무선은 어쩐지 조금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용이 성장을 할 때 느끼는 감정은 역사적으로 비슷했다. 유년기를 의지해온 각인자가 죽었다는 충격과 슬픔에 잠겨 비와 눈이 계절에 상관없이 한 달이든 두 달이든 하염없이 내렸다. 때문에 한여름에 눈이 내리는 기현상이 벌어지면 인간들은 ‘용신께서 시련을 겪는구나.’라고 생각해 공물도 바치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슬픔에 잠긴 용에겐 아무런 기도를 올리지 않고 혼자 놔두는 게 낫다는 것을 그들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랜 관습으로 굳어졌기에 인간들은 현재 상황에 당황했다. 인간들뿐만 아니라 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대의 용신인 남망기의 ‘성장통’은 역사서를 뒤져봐도 사례가 없을 만큼 독특했다. 그가 앓고 있는 감정은 바로,
연정.
때문에 인계에는 한 달째 살인적인 폭염이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좋아 죽겠다는데 어쩔 수 없지.”
위무선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즐거워 죽겠다는 말투라 남계인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마지막 독대를 하던 게 민망하게 멀쩡히 살아 돌아온 위무선은 요 며칠 남계인의 속을 있는 대로 뒤집어놓고 있었다. 물론 위무선이 안 죽어서 못마땅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마냥 좋다는 건 아니었다.
남망기가 위무선을 은애하는 마음만으로 성장을 했다는 건 위무선이 죽을 경우 남망기도 따라서 죽을 확률이 높다는 거였다. 용은 슬픔이 너무 지나치면 정신이 무너져 여의주가 흩어져버린다. 때문에 용신의 권속들은 지옥에 내려가 위무선에게 내려진 소멸형을 물려달라는 청을 했다. 염라대왕은 대답이 없었지만 침묵은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죄인의 처벌보단 용신의 생존이 더 중요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아무도 죽지 않은 평화로운 결말이 났지만 남계인은 그렇지 않았다. 앞으로 평생 저딴 놈을 용신의 각인자로 모시고 살아야 할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이다.
남계인은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위무선. 자네도 이제 어엿한 용신의 권속이니 자부심과 위엄을 가지고,”
“어쭈, 말이 짧다?”
“…….”
남계인은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위무선을 한 대 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용신의 각인자는 모든 권속들의 수장이나 다름없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위무선은 당장 태도를 바꿨고 말끝마다 서열을 들먹이면서 남계인의 속을 박박 긁었다.
“……잊은 모양이지만 나도 선계의 용신의 각인자다.”
결국 이쪽도 치졸하게 서열을 들먹일 수밖에 없었다. 본디 선인이란 만백성을 짊어지는 일꾼이니 늘 겸손해야 한다고 가르치던 게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용신께선 어떠하시지?”
남계인이 화제를 돌렸다. 위무선은 장난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답했다.
“귀엽던데.”
참으로 불경한 발언에 남계인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위무선은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상사병과 비슷한 걸 앓고 있는 남망기는 현재 위무선과 격리당한 상태다. 인계에는 한 달째 이어지는 폭염 때문에 가뭄이 일어나 농작물이 죽어가는데 그런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남망기가 위무선만 보면 평정심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위무선을 연상시키는 것들을 모조리 치우고 면벽수련만 반복하는 중인데도 그랬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그대를 보기에는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싫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는…….’
‘부탁이니 멀리 가주세요. 제가 통제력이 약해져서 그대를 어떻게 할지도 모릅니다.’
‘너무 멀리 가진 마세요. 그대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으면 제가 불안하고 슬퍼서 견딜 수 없습니다.’
“귀여워 죽을 것 같았지.”
열병에 시달려 발갛게 달아오른 채로 그런 말을 하다니, 수천 년 묵은 여우라도 당장 무릎을 꿇게 할 만큼 엄청난 광경이었다. 그걸 뒤에서 보고 있던 선인들도 얼굴이 빨개져 도망치듯 자리를 피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남망기의 애틋한 가슴앓이로 애꿎은 사람들만 피해를 보고 있으니 참으로 불공평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용신의 연애담에 남계인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웃어 넘길 일이 아니네. 가뭄이 멈추지 않으면 백성들은 겨울을 날 수 없고 백호들도 원성을 하게 될 거야.”
대지를 주관하는 백호에게 비는 없어선 안될 존재다. 인계에 이어지는 폭염이 백호의 영역에 악영향을 미칠 정도로 길어지면 상황이 아주 복잡해진다. 가뜩이나 위무선이 나타난 뒤로 연화오의 분위기가 살벌해지고 있는데 거기에 불을 붙일 순 없었다.
위무선은 약간의 침묵 뒤 말했다.
“백호보다 더 큰 문제가 남아있는 것 같던데.”
“…….”
“선계의 용에 비하면 남망기는 외양이 한참 어리더군. 인간으로 치면 이립을 넘겨야 하는데 지금의 남망기는 많아봤자 약관이니.”
“…….”
“성장이 덜 된 건가?”
남계인은 한숨을 쉬었다. 위무선이 언급한 건 성장한 남망기를 본 순간부터 그 또한 눈치챈 사실이었다.
남계인이 말했다.
“연심으로 성장의 껍질을 깬 것부터가 기적 같은 일이었네. 애초에 용의 성장은 그런 낭만적인 감정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야.”
“시련은 고통스러워야 한다는 건가?”
“그렇지.”
“그럼 두 번째 성장을 해야 하는 건가?”
“허튼 생각하지 말게나.”
남계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는 죽어선 안되네. 자네의 죽음은 용신의 죽음으로 이어질 테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야 해. 만약 염라께서 다시 소멸형을 내리시면 그 처벌은 내가 대신 받도록 하지.”
“…….”
“내가 다른 방법을 모색할 테니 자네는 백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있게나. 안 그래도 이 일로 천제 폐하께 조언을 구하러 갈 생각이었…….”
남계인의 말이 끊겼다. 위무선이 긴 팔을 뻗어서 쓰다듬듯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기 때문이다. 남계인은 순간 상황 파악이 안 되어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여우 가면 속에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네 목숨을 경시하지 말아라.”
“…….”
“대의를 위한다 해도 너 또한 귀한 사람이니 자기 목숨을 수단처럼 여길 필요는 없어.”
네가 없으면 운심부지처는 누가 책임지느냐? 그 말과 함께 머리가 툭툭 쓰다듬어졌다. 황망한 얼굴을 한 남계인은 한참 뒤에야 입을 뗐다.
“자네는 모든 사람이 어린애로 보이나 보군.”
“나처럼 질릴 만큼 나이를 먹으면 너도 그렇게 될 거다.”
“그러게 왜 죄를 지었나.”
“세상사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고의가 아니었다는 건가?”
“내 말을 믿나?”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하니까.”
선인들의 교육자다운 고지식한 대답에 위무선은 피식 웃었다. 그는 한참 뒤 말했다.
“고의가 아니었어도 상관 없어.”
“…….”
“결과는 달라지지 않으니.”
주작의 두 아들을 죽이고 백호 일가를 몰살시키고 마지막으로 용신까지 죽여 인계를 초토화한 희대의 살인마. 전설처럼 전해져 온 악명과는 달리 남계인이 본 위무선의 실상은 많이 달랐다. 남계인은 교육자답게 사람 보는 눈이 탁월했고, 그런 그가 본 위무선은 살인자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악인들의 영혼에서 풍기는 특유의 악취도 없고 무엇보다 천제가 그를 경계하지 않았다. 사방신의 조화를 가장 중요시하는 천제가 위무선을 선계에 들였다는 것부터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남계인은 한참 뒤 말했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해.”
“지극히 사소한 질문이다.”
“뭘 그렇게 뜸을 들여?”
남계인은 원래 서론이 긴 편이지만 지금은 위무선의 눈치를 약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말꼬리를 틀어놓고도 한참을 고민하다 물었다.
“전생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그리고 남계인의 예상은 맞았다. 미묘한 정적 후 위무선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 경박한 웃음소리에 남계인은 끝내 썩 꺼지라며 일갈했다.
염라의 형벌 중 가장 혹독한 건 소멸형이 아닌 영생형이다.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살아있다면 기회가 찾아온다. 죄를 용서받을 기회, 개과천선할 기회, 행복해질 기회. 살아있는 생명체가 추구하는 그 모든 기회를 영생형은 송두리째 빼앗아간다. 즉 모두가 평화로운 결말이라 여기는 지금 이 상황이 위무선에겐 불행의 시작이었다.
위무선은 용의 수명을 가늠해봤다. 제 등을 가리는 꼬리 하나에도 못 미치는 시간이었다. 꼬리가 하나뿐인 여우였을 적엔 수백 년을 사는 사방신들이 저와는 차원이 다른 생물이라 생각해 동경을 가졌다. 그리고 현재의 자신은 그 사방신들의 서른 한 번째 환생을 보고 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생명은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 성장을 했어도 여전히 솜털이 만져질 것 같은 어린 아이지만 그런 남망기도 언젠가 숨이 다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때문에 위무선은 생각했다. 내가 과연 그 순간을 견딜 수 있을까.
시작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남희신과 남계인을 비롯해 매일 보고 지내던 이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귀로만 소식을 전해 듣는 연화오에서도 강징의 부고 서신이 날아올 거다. 그 모든 사람들의 아이도, 그 아이의 아이들도 전부 죽게 된다. 그러다 결국 남망기까지 사라지게 되면 나는 어찌하나. 너의 예순 한 번째 환생을 기다리다가 그만 미쳐버리면 어떡하지.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는 건 죽음을 경험하는 것과 비슷했다. 불러주는 이가 없는 제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그렇게 고립되어서 공기나 다름없는 존재로 살아가면 세상도 그를 잊게 된다. 위무선은 그 외로움을 다시 겪을 자신이 없었다. 이 점이 무서워서 난장강을 나오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약조하지 않았는가. 이번 생에는 남망기가 죽는 순간까지 그 옆을 지킬 거라고. 상실의 두려움과 속죄 중에서 어디에 무게를 둘 것이냐 하면 위무선은 망설임 없이 후자였다. 전생도 모자라 현생까지 저를 은애한다 말하는 이였다. 그 마음만으로 성장까지 한 아이를 위무선은 절대로 내칠 수 없었다. 그러니 더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그는 자신의 감정을 돌보는 사치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전생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궁금해하는 남계인이 떠올랐다. 남망기가 전생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졌듯 남계인도 마찬가지였다. 위무선은 그들의 모습이 눈부시고 찬란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었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를 반성하며 정진할 수 있고 끝이 있기에 매 순간이 애틋하고 소중했다. 시간이 멈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수명이 유한한 생명에게 마음을 줘버린 이상 그의 모든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애틋하게 담아내야지. 매 순간을 후회 없이 간절하게.
상념에 잠긴 채 주변을 걷다 보니 저도 모르는 새에 정실 앞에 도착했다. 각인의 영향은 남망기뿐만 아니라 위무선에게도 미쳐서,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신도 늘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아직도 들어갈 수 없나. 나도 슬슬 한계인데. 위무선은 기척을 죽이고 정실 뒤편으로 돌아갔다. 깨어있다면 물러나고 자고 있다면 얼굴만 보고 가자. 그리 결심하며 침상이 보이는 창가로 향하는데 예상을 깨고 남망기가 정실 밖에 나와 있었다. 보라색 용담이 가득한 꽃밭을 보며 등을 진 채 서 있는 모습에 위무선은 걸음을 멈췄다. 밤하늘을 담아낸 듯한 용담과 그 위를 거니는 반딧불이가 용의 모습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위무선의 걸음을 멈추게 한 건 그 아름다운 자태가 아니었다.
남망기가 손에 작은 약병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뚜껑이 열려있었다. 바닥을 향해 기울어진 약병에선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마치 내용물이 비워진 듯이.
위무선은 눈을 크게 떴다. 전신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갔다. 잘못 보고 있는 건가 싶어서 가면을 벗고 다시 확인했지만 눈앞의 광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 남망기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과 함께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왔다. 긴 머리칼이 허공에서 아름답게 일렁거렸다. 여우를 정면에서 보는 금안은 이전처럼 부끄러움과 서툰 연정에 달아올라 있지 않았다. 얼핏 차가워 보이지만 더없이 깊은 눈빛은 어딘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더 놀랄 건 따로 있었다.
소년의 풋풋함이 사라진 지금의 남망기는 이립을 넘긴 완연한 어른의 모습이었다. 위무선보다 키가 더 커지고 곱기만 하던 육신이 강철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벼락으로 동굴을 부수고 지진을 만들던 전과는 달리 정실에 자리한 용담들만 알 수 있을 만큼 조용한 성장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남망기의 금안에서 눈물이 고여 흘러내렸다. 위무선은 점점 숨이 막혀갔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 가능성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지옥의 정수로 만든 저 약은 한 번 마시면 영생을 살고 두 번 마시면 영혼까지 소멸한다.
그리고 영생을 얻으면 망각하는 능력을 빼앗긴다.
즉, 전생의 기억이 모두 살아나게 된다.
“위영.”
천 마디의 말보다 더 확신을 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 억양, 그 안에 깃든 감정까지 완벽하게 기억과 똑같았다. 위무선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데일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운 것이 너무 오래전이라 까마득하기만 해서 눈물은 통제되지 않았다. 목구멍이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답답했다. 한참 뒤 가슴을 쥐어짜는 고통을 삼키고 위무선이 물었다.
“남잠……?”
그 부름을 듣자마자 남망기는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쓰러지듯 마주 앉은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위무선의 뺨에 가져갔다. 상처 하나 없이 살아 숨 쉬는 육신을 확인하듯 더듬던 그는 이윽고 위무선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울음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던 위무선은 한참 뒤에야 오래 전부터 숨겨온 마음을 두서없이 꺼냈다.
“남잠, 난 널 죽이고 싶지 않았어.”
구차한 변명처럼 들려도 어쩔 수 없었다. 위무선은 눈을 질끈 감았다. 후두둑 쏟아지는 눈물이 그의 단단한 어깨를 적셨다.
“그냥, 너랑 같이 죽고 싶었는데…….”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날 동굴에서 위무선이 남망기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는 위무선을 감싼 죄로 벌을 받을 터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현묘한 존재가 고작 저로 인해 인간이나 하찮은 미물 따위로 전락하게 할 순 없었다. 하지만 본심은 달랐다.
사실은 함께 죽고 싶었어. 죽어서 너의 손을 잡고 같이 황천길에 오르고 싶었어. 아무리 무서운 형벌이라도 네가 있으면 견딜 수 있을 테니까. 사방이 아비규환인 난장강에 영원히 유폐되는 것조차 네가 함께라면 기꺼울 테니까.
많이 아팠지. 미안해. 미안해…….
위무선이 남망기의 심장이 있는 가슴 부근을 더듬었다. 남망기는 그 손을 양손으로 꼭 붙들었다. 위무선의 손등 위로 그의 눈물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머릿속이 그를 향한 사죄로 가득 차 두서없이 말을 뱉는 위무선과 달리 남망기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셀 수 없이 많은 감정들이 그를 집어삼켰다. 그 모든 것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남망기는 다시 위무선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뺨에 닿은 단단한 가슴에서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그 따뜻한 소리에 위무선은 끝내 소리 내어 울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참아왔는지 모르는 아이 같은 울음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울어도 들어주는 이가 없었기에 의미 없는 소음뿐이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억겁의 시간이 흘러 그가 제 곁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것도 영생이란 고통스러운 선택을 하며 평생 제 곁에 있어 줄 거란 무언의 약조를 했다. 왜 나를 죽였냐는 원성 한 마디조차 하지 않은 채였다. 위무선은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남잠, 널 은애해.”
드디어 대답을 해줄 수 있게 되었다.
“나도 널 사랑해. 너를 원해. 뭐든지 하고 싶어. 너랑 매일 자고 싶고 늘 함께하고 싶어. 네가 아니면 안 돼. 네가 없는 시간은 너무……너무…….”
삼 천 번의 죽음보다 더 괴로워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어…….”
위무선은 무너졌다. 오랫동안 필사적으로 붙들어온 끈이 풀리는 감각을 느꼈다. 슬픔과 기쁨과 안도감에 정신이 무너진 그는 수천 년을 유지해온 긴장이 풀리고 말았다. 인간의 모습을 한 주술이 풀리고 원신으로 돌아간 그는 머금은 세월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작은 여우로 변했다. 윤기 나는 갈색 털로 덮인 한 품에도 안 들어올 작은 여우가 낑낑대며 소리 내 울었다. 남망기는 그 여우를 품에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차가운 밤바람에 몸이 상할까 봐 넓은 소매로 여우의 등을 덮어주었고, 너무 작고 말랑한 감각에 어디 다치기라도 할까 봐 손에 힘을 빼고 최대한 부드럽게 품어주었다.
위무선은 제 원신이 이토록 작은 것이 싫으면서도 좋았다. 남망기가 용의 모습으로 위무선을 보호했듯 위무선도 그런 거대한 영물이 되어서 그를 둘러싸고 싶었다. 하지만 이토록 작은 몸집이기에 이 품에 마음껏 파고들 수 있단 생각을 하니 더없이 행복하고 좋았다.
너를 생을 지키다 가는 게 나의 속죄라 생각했어.
하지만 이렇게 되면 나도 욕심을 부릴 수 있구나.
네 죽음을 매 순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너로 인해 나에게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생겨서
모든 시간을 아름답고 찬란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구나.
여우는 제 손에 찢겼던 남망기의 심장 부근을 안타깝게 할짝였다. 작은 주둥이에선 울음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남망기는 그런 여우의 이마와 두 뺨에 젖은 입맞춤을 했다. 용의 심정을 대변하듯 가뭄에 메말랐던 인계에는 부드러운 비가 쏟아졌다. 죽어가던 생명을 다시 살려내는 다정하고 상냥한 눈물비였다.
-후일담-
남망기의 두 번째 성장과 함께 인계는 날씨의 조화를 되찾았다. 남망기가 되찾은 전생의 기억에는 역대 용신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높은 수양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해갔다. 죽어가던 농작물이 살아나고 계절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자 인간들은 용신이 시련을 극복한 것을 축하하는 축제를 벌였다. 남망기와 위무선은 인계에 내려가 그 축제를 함께 구경하러 다녔다. 산사나무 열매로 만든 당호로도 먹고 길거리에서 시음용으로 내주는 천자소도 한 입씩 나눠마셨다. 물론 남망기가 술을 마시자마자 그 자리에서 잠들어서 위무선은 그를 객잔까지 낑낑대며 끌고 가는 고생을 해야 했다.
남망기가 영생이 되는 약을 먹었단 말에 남희신과 남계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기함했다. 환생의 수레바퀴가 멈추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어째서 한 거냐는 추궁이 쏟아졌지만 이내 의미 없는 질문이라는 걸 그들도 깨달았다. 남망기의 품에 안겨 고롱고롱 잠이 든 여우와 그 등을 쓰다듬는 남망기의 표정이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만큼 평화롭고 행복했기 때문이다.
정실 뒤편의 용담 꽃밭에서 눈물비를 내린 뒤 남망기의 평정이 깨질 일은 없어졌다. 아무리 힘들고 슬픈 일이 생겨도 위무선이 곁에 있다면 극복할 수 있었다. 그는 애초에 위무선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감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그러한 용신 덕에 인계는 영원토록 재해 없는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
위무선은 평소와는 다른 이질감에 주변을 둘러봤다. 사방이 어둡고 안개로 막혀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망기의 품에 안겨서 잠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다른 장소였다. 꿈인가 싶었지만 주변이 너무 익숙하고 생생해서 현실이라는 걸 눈치챘다. 이곳은 지옥의 심판대였다. 오밤중에 자는 사람의 영혼을 빼서 지옥으로 소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천하에 딱 한 명 뿐이었다.
쿵!
안개가 거둬지면서 드러난 염라의 권속들이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찍었다. 그 호령에 위무선은 무릎을 꿇고 예의를 갖췄다. 잠시 뒤 안개로 가려진 드높은 옥좌에서 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구나.]
염라의 부름이 있다면 사방신이라도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가야 한다. 그런데 고작 여우에게 저런 말씀이라니,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무릎을 꿇은 위무선은 웃음을 흘렸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분이군요.”
위무선은 영생형에 처한 순간부터 염라대왕을 보아왔지만 그에 대한 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늘 안개에 가려져 생김새도 알 수 없고 목소리도 매번 달랐다. 염라의 목소리는 인자한 노인이었다가 천군만마를 이끄는 장수이기도 하고 발랄한 어린아이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곱고 아리따운 여인의 미성이 들렸다. 위무선이 말했다.
“남 선생을 통해 전해준 그 ‘약병’은 염라께서 허락한 자만 열 수 있지요. 그런데 남잠이 그것을 열고 마셨습니다.”
[…….]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던 거죠?”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염라라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위무선이 죽지 않더라도 남망기가 성장할 수 있었음을.
“천제 폐하가 사방신들의 반발을 억누른 건 염라께서 절 비호하셨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것도 모자라 남잠에게 영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다니.”
[…….]
“왜 그렇게 저에게 잘해주십니까?”
염라대왕은 모든 영혼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이다. 드넓은 자비와 포용심으로 영혼을 다루지만 죄인에겐 더없이 두렵고 엄격한 존재였다. 그래서 위무선은 염라대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용을 죽여 인계에 큰 피해를 입힌 자신이었다. 영생형을 내린 후 염화지옥에 가둬 온종일 불에 타는 고통을 느끼게 해도 모자란데, 그런 자에게 난장강을 내주어 영혼들에게 직접 사죄하고 도력을 쌓을 기회까지 주었다. 자신의 무엇이 그의 자비를 끌어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염라대왕이 말했다.
[작별 선물이란다.]
그 말에 위무선이 고개를 들었다. 안개 속에서 상냥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바로 오늘 염라로서의 임기를 끝내 환생의 길에 오르게 되었거든. 그래서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널 불렀단다.]
“……그렇습니까. 축하드립니다.”
왜일까. 위무선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깨달은 거지만 위무선은 난장강에서의 아득한 세월을 홀로 보낸 게 아니었다. 염라대왕이 늘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환생을 한다면 가족을 만날 수 있겠군요.”
[그래. 나 역시 내 반려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했으니 어서 길을 떠나려한다.]
“그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너 역시 고생이 많았다.]
아선.
귀를 의심하는 단어에 위무선이 눈을 크게 떴다. 한순간 주변의 소음이 차단되고 이상한 이명음만 들렸다.
옥좌의 안개가 걷어지면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까지 끌리는 검은 비단옷 위로 금빛의 장신구가 차르르 부딪혔다. 자수정으로 이루어진 면류관 너머로는 고운 여인의 턱선이 보였다. 염라가 모습을 드러내자 양옆에 일렬로 서있던 권속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
위무선은 저에게 다가오는 상대를 숨도 못 쉰 채 바라보았다. 어느새 심판대 위로 오른 그녀가 위무선의 앞에 마주 앉았다. 면류관 너머로 고운 얼굴이 보였다. 위무선은 차마 손을 뻗지 못한 채 덜덜 떨었다.
“……사저.”
그의 부름에 강염리는 아름답게 웃었다. 그 눈부신 미소에 위무선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사저, 나는, 나는…….
위무선은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내뱉을 수 없었다. 사과를 해야 할지 감사를 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안부 인사라도 해야 할지. 사저,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나 때문에 부군을 잃고 태어난 지 한 달밖에 안 된 아이를 두고 저승길에 올라 슬프고 비참했을 텐데, 왜 환생하지 않고 염라가 된 거야? 그냥 나 같은 거 혼자 놔두고 떠나서 행복하게 살지, 왜 그 오랜 세월 내 곁을 지켜준 거야? 대체, 대체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강염리가 고운 손을 뻗어서 위무선의 눈물을 닦아줬다. 위무선은 그 손을 양손으로 맞잡고 뺨에 기댔다. 부드러운 손의 감촉은 마지막 기억과 달랐다. 피에 젖은 채로 제 뺨을 어루만지다가 끝내 바닥에 떨구던 순간과 달랐다.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살아서 이렇게 제 곁에 머물러주고 있었다.
“미안해.”
결국 위무선이 할 수 있는 건 두 단어였다. 사람이 평생 꼭 해야 할 말이었다.
“고마워…….”
그녀에게 이 말을 전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었구나.
나를 사랑해주고 지켜주는 사람이 늘 곁에 있는 과분한 삶을 살고 있었구나…….
강염리는 환하게 웃었다. 너를 용서한다던가 너를 탓하지 않는다는 말보다 더 안도를 주는 미소였다. 그에 위무선은 젖은 눈물 속에서 끝내 웃었다. 순수한 기쁨에 젖은 아이 같은 미소였다.
영원히 이어질 거라 생각했던 속죄가 드디어 끝을 맺었다.
약 23,000자
영생을 사는 용 망기 × 영생을 사는 여우 무선이
트위터에 용망여무 붐이 일어났길래 저도 동참해봤어요. 공식이 떠주는 연성 소재는 역시 최고...^^
이번 글은 제가 좋아하는 노래인 숀의 <Way back home> 가사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멈춘 시간 속 잠든 너를 찾아가.’
‘길고 긴 여행을 끝내 이젠 돌아가.’
아침에 씻으면서 이 노래를 듣다가 환생썰이 생각나서 바바박 썼지요. ㅎ.ㅎ
원작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라 무선이의 과거 이야기는 자세히 쓰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분량이 너무 많아서... 다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흑흑... 왜 가면 갈수록 내용이 길어지기만 할까요...
분명 처음엔 뽈뽈거리는 애기 망기를 보려고 쓴 거였는데 가다 보니 너무 무겁고 슬프게 변하더군요. 원작 망기와 무선이의 삶을 쓰다 보니 막 울컥해서 내용 전개가 저도 모르게 우울한 쪽으로 내려가고 말았네요 ㅠㅜㅠ 그럼에도 전달하고 싶던 건 모두가 욕하고 무서워하는 무선이도 결국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라는 거... 그걸 스스로 깨닫고 안도해서 아이처럼 우는 걸 보고 싶었어요. 우는 게 때로는 웃는 것보다 기쁨을 더 잘 표현하잖아요. 전 무선이가 발랄깡충한 것도 좋지만 힘든 순간에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길 바래요. 이제 망기도 있으니 시원하게 울고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자, 무선아!!!!
모두 이번 글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을바람이 차가워졌으니 모두 감기 조심, 코로나 조심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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